성장이 정체된다는 느낌이 꽤나 오랜 기간동안 지속됐었다. 처음 그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 21년도, 22년도 쯤에는 금방 해결될 줄 알았으나, 벌써 4년이 넘는 시간동안 “유레카!” 싶을 정도로 해결이 되지는 않았다.
이 고민이 시작됐던 21년도, 22년도에는 내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고민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당시에는 “현재에 집중하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24년 그리고 25년, 퇴사 이후 체력이 올라올 수록 다시 성장에 대한 고민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2년이란 시간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었다. 내 주변 사람들이 각자의 선택을 하고 그곳에 집중하고 있는 시기였다. 그 즈음 해서 한동안 나가지 않았던 해외 여러곳도 다녀오고 나니, 내가 너무 오랜 기간동안 같은 자리에 있어서 바라보는 시야가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부처님 손바닥 밖으로
자아가 형성된 10대 때부터, 나의 욕망은 “자유” 그리고 “더 크고 넓게 생각하기”로 요약할 수 있었다. 나는 늘 더 넓고 크게 모든 문제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사람들과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삶을 살아갈 수록, 어떠한 힘이 나를 방해하고 있는 느낌을 받곤 한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록 그러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부모님은 너가 안정적으로 살았음 좋겠다, 그래도 대학은 졸업하는게 좋지 않겠니 같은, 흔하게 받는 질문들 말이다.
이제는 보여지는 날카로움을 줄일 수 있어서 이런 질문을 유하게 넘기게 되었지만, 이런 질문에 답을 흐리면 흐릴수록 답답해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같은 질문을 계속 받게 되면 조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같은 질문들은 비슷한 대답을 이끈다는 점이다. 비슷한 질문을 받은 사람들에게 아무리 조언을 구하고 이야기를 들어도 비슷한 결론으로 수렴하게 된다. 사람은 생각보다 다양성을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얻은 대답은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질문을 받은 사람이 완전히 다른 대답을 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더 좋은 대답을 위해서
더 좋은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더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전혀 뜬금없는 질문을 문득 떠올릴 수 있지 않다.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내가 내렸던 질문들과 나의 주변 환경과 사람들이 던지곤 했던 질문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디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나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 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걸어야 할 것만 같은 질문도, 누군가에게는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있다. 즉, 그리 어렵지도 않은 선택지도 누군가를 옆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인생을 걸어야 할 것만 같은 선택지가 되는 것이다.
나같은 평범한 의지력을 가진 일개 인간은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주변 환경을 바꿔야 한다. 내가 던지는 질문을 그렇게 크고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해볼 만한 질문으로 여기고 같이 해줄 수 있는 곳 말이다.
비단잉어의 특이한 성질을 알고 있는가? 비단잉어는 먹이가 충분하더라도 연못의 크기가 작다면 더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큰 연못에 있다면 충분히 커질 수 있다.
우리도 비단잉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더 크고 넓은 환경에 있을수록, 더 크고 넓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내 삶이 지금보다 더 색다른 질문들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다른 이들이 던진 질문에 대답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던진 질문들의 비중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앞서 말한 자유에 “원하는 질문을 던지고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자유”가 하나 추가된 듯 하다.
그리고 이 환경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은 다 던진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큰 연못으로 가야 한다. 늘 마음속에 새기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문구를 언급하며 마무리한다.
나는 늘 더 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