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 미역국에 대하여

개인적인 생각에 관한 글

소고기 미역국 대입법을 많이 쓰는 요즘입니다. 일을 할 때 “그 시간에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고기 미역국 한 그륵 끓여주는게 훨 낫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만일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주는 것보다 가치있다면 일을 실행에 옮기고, 그렇지 않다면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이죠.

올해 4월까지만 하더라도, 제 마음에게 미역국 한 그릇 얻어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소고기 미역국 대입법의 허들을 매우 낮게 책정했기 때문입니다. 밀려오는 일이나 해야 하는 일들을 그냥 다 처리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꽤나 처참했습니다.

그래서 소고기 미역국 허들을 매우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생각만으로 끓인 미역국이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그릇정도 남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끓인 미역국이 상반기 통틀어 없다는 것은 비밀이지만요.


최근 험난한 소고기 미역국 관문을 통과한 일 중 하나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다시 읽는 것입니다.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산티아고의 보물은 산티아고가 책 처음에 하룻밤 묵었던 수도원 옆 나무 밑에 있었습니다. 조용필 선생님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가사가 떠오르는 듯한 이야기이지 않나요. 이 노래 클라이맥스 부분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건 옆에 있다고
먼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조용필

노래 가사는 떠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주변을 잘 챙기자는 이야기로 들립니다만, 책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더욱 집중합니다. 책에서 산티아고는 그 과정을 모두 겪고 나서야 진정한 보물이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과연 산티아고가 떠나지 않았다면, 진정한 보물의 위치를 알 수 있었을까요?

이처럼 떠나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변 일들에 휩쓸리다 보면 객관적인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기 어려워지기에,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에 나를 던져보면 모든 것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떠난 이후에는 생소한 주변 풍경만큼이나 스스로의 다양한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흔히들 “떠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물리적인 상황의 변화를 생각합니다. 떠난다는 동사를 말하면 이사, 여행등과 같은 물리적 장소의 변경이 연상되는 것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떠남”도 겪기 마련입니다. 제 취향의 변화도, 커리어상의 도메인 변화도 일종의 “떠남”이겠죠.


올해 2분기에는 커리어 고민을 깊게 했습니다. 10대 후반과 20대 초중반의 몰입감을 다시금 겪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몰입의 순간을 다시 겪기 위해 어느 도메인에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고민하며 보냈습니다.

책을 읽게 된 계기도 친구와 미래에 대한 고민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어떤 일을 하고 살아야 하나. 내가 정말 바라는 일은 무엇일까. 한탄 비슷한 고민을 나누다 보니 둘 다 과거의 어떤 지점을 되짚고 있더군요. 단순히 과거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는 내용이 아니라, 여러 현실적인 고민들을 할 필요가 없는 순간에 가장 집중하고 있었던, 삶을 관통할 수 있는 주제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둘 다 “연금술사”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흔한 일은 아니죠?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책에서는 직관적인 목표 제시를 위해 보물이라는 목표를 제시하지만 이는 맥거핀에 가깝습니다. 보물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산티아고가 자아의 신화를 살아가는 것을 가장 큰 주제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산티아고는 돈도 몇번이나 잃고, 바람이 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역경 앞에서 좌절도 하고 분노도 하지만, 스스로의 마음에 귀기울이면서 헤쳐나갑니다.

이걸 깨닫게 되는 순간 앞서 했던 고민의 대부분이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저와 제 친구가 과거를 떠올렸던 것도, 그냥 어린 시절이 좋았다! 는 단순한 추억팔이가 아니라 여러 현실의 문제로부터 촉발되는 소음이 없던 시절의 마음이 알려주던 순수한 즐거움이었다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답은 스스로에게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야기의 방향성이 정해졌으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커리어 내내 새롭거나 기존에 해 왔던 일들을 더 잘 해내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식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 이후에 “어떻게 문제를 잘 풀 것인가”가 따라오곤 했습니다. 커리어 초반에는 단순히 시간을 많이 쓰는 것만으로 스스로 성장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지만, 커리어가 쌓이고 나서는 단순히 시간의 양을 늘려서는 해결되지 않더군요. 자연스럽게 성장 또한 이번 상반기 중요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것이든 시작한지 수개월 만에 뛰어나게 잘 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수년을 시간을 쏟아도 제자리걸음인 사람도 있습니다. 하려고 했던 일에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던 올해 초를 다시 되짚어 보겠습니다.

이전에는 이런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일 때마다 더 시간관리를 잘 해야겠다는 방향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올해 역시 같은 방향으로 결론을 내릴 뻔했지만, 엇나감을 크게 바꿔 준 조언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관리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에너지를 관리한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라는 것이죠.

머리가 띵-하고 울렸습니다. 결국 해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너무 즐거워서 힘든지도 모르고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은 지속력이 부족합니다. 그 이후에는 수많은 하기 싫은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죠.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기초 체력이 중요합니다. 일을 끝내고 가기 싫은 몸을 일으켜 운동을 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기 싫은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요.

집중하기, 체력을 기르기, 일단 실행하기.. 너무 기초적인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고 있자니 퍽 쑥쓰럽습니다만, 복잡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실마리로는 이것만큼 적합한 게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불확실하고 복잡한 세상을 살고 있고 세상의 흐름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예측하기에 너무 변화무쌍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위에서 말한 기초를 단단하게 지켜 나가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생각을 이번 상반기에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마주할 수록 점점 더 기본기가 중요해진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의 화자도, “연금술사”의 산티아고도 모두 돌아와서 정말 소중한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요.

위에 언급했던 고민들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행복한 삶을 위한 것입니다. 소고기 미역국 관문도 결국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아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소고기 미역국 한 그릇정도는 끓여 줄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만들자는 일종의 다짐에 가깝습니다.

원래는 상반기 회고를 위해 꺼내들었던 이 글을 한달동안 다듬게 된 것도, 그리고 그 다듬음의 끝이 하나의 떠남을 완결짓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라는 사실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이 떠남이 끝나고, 올해의 끝이 다가올 때 이 글을 다시 쳐다보게 될 즈음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소고기 미역국을 꽤나 대접했길 바라봅니다.